020225

 


벌써 마은히 된 딸에게 - 한성희

"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요. 꼭 뭐가 될 필요 없어. 마우것도 안돼도 돼. 너는 그냥 그 자체로 사랑스러워,"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흔을 앞두고 갑자기 떠난 이유
마흔이 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내가 긴 여행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율여 들어 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ㄷ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자 프레데릭 M. 허드슨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기에 빠진 이 상태에 대해 "당신은 자신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 즉 과거에 당신이었던 사람의 가정을 돌보는 집사가 된 것처럼 느낀다" 라고 표현했다.

정체기가 극에 달하면 드디어 선택의 시간이 찾아온다. '가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를 것인가,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을 것인가?' 이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만ㄴ약 북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한다면 삶의 목록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에 인생에 의미를 더해 주는 것은 지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저항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면 안 된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다른 이들에게 위임하고 그럼에도 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과감히 쳐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의 구조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껏 이룬 것이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그것을 잃기가 두려운 사람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마음먹고는 가슴에서 울리는 북소리와 현실 간의 괴리를 무시하기 위한 온갖 방도를 계발한다. 그리고 어느덧 그 생활에 적응해 버린다. 이런 상태에 대해 미국의 소설가 존 가드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난 온갖 교모한 방도들을 생각해 낸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바쁘게 만들고, 자신의 삶을 여러 가지 오락거리로 채우고,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지식을 꽉꽉 담아 넣고,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기저기 오지랖 넓게 기웃거릴 시간은 있지만 그러느라고 우리 내면의 두려우면서도 멋진 세계를 탐험할 시간은 결코 없다. 그래서 중년기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데 능란한 선수가 되어 있다."

일본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가 한 말을 떠올리렴.
"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런데 다행히도 정신분석가 칼 융은, 마흔에 접어들어 경험하는 혼란은 삶을 재정비하고 다시 성장하기 위해 거치는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년기는 절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힘과 모든 의지를 다해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해가 지기 시작하고 인생 후반기가 시작된다. 열정은 이제 얼굴이 바뀌어 의무라고 불린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고, 한때 놀라움과 새로운 발견을 가져다주었던 길이 이제는 습관에 의해 지루해진다. 와인은 부글부글 끓으며 발효되다가 침전 과정을 거쳐 비로소 맑아진다. 그는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의 재고 조사를 하기 시작하고 자기 인생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때 진정한 동기를 추구하고 진정한 발견이 이루어진다."

수상록
"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아내, 자녀, 물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이 좌우될 정도로 그런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 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은 자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외부와의 관계나 소통이 단절되는 은밀한 장소라야한다. 이곳에서는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자녀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종과 하인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나 재산을 잃게 되더라도 이들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고 즐겁고, 행복하면 그뿐
어린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즐거움 그 자체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는 그 안에서 공주 왕자 놀이도 하고, 살림 놀이도 하고, 전쟁 놀이도 한다. 세상의 축소판 같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규칙을 배우고, 갈등을 경험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놀이에 몰입한다. '내일 이 놀이를 계쏙 할 수 있을까?', '내가 어제보다 잘하고 있나' 따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모든 재미에 자신을 100퍼센트 열어 놓는다.

어른에게는 취미가 아이들의 놀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취미는 현실의 나를 잠시 잊게 하고, 이행 공간으로 데려다준다. 이행 공간은 현실과 환상을 연결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현실에 찌든 마음을 치유하고,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맛보는 기쁨을 얻는다. 창조성, 예술, 문학은 모두 이행 공간에서 일어나는 작업들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겐 취미가 필요하다. 외부에서 가해 오는 조건이나 압박에서 벗어나 내면에 집중하고 몰입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잘하든 못하든, 대단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상관없다. 내가 좋고, 즐겁고, 행복하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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